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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알게 된 경로는 <문장과 표현> (수필시대 2006)이라는 글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를, 보다 정교한 방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작가 윤오영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다시 알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다. 윤오영 선생님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방망이 깎던 노인>이라는 수필이 있다. 이는 대중들이 수필에 좀 관심이 있어서 안다기보다 국어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일 것이고, 그마저도 내용이 기억나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아는 사실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윤오영 선생님에 관한 평은 다양하다. 평론가들의 분석이나 글을 쓴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학술적으로나 문학사적으로 보는 평들이 주다. 한국 수필에 한 획을 그은 사람 정도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수필이라는 일종의 한 장르가 어떤 기준이 명료하게 존재해서 산문 스타일을 정리해둔 바가 많이 없다. 수필이 단순한 잡문으로 치부되는 것인지 교과서에서 정의해놓은 ‘수필’이라는 개념으로 해둔 것인지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경계 자체도 모호하고 무엇보다 명료한 답을 내기 어려운 것이 또 수필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나의 경우 인문학이 특히 더 그러했다. 머릿속에 단순한 질문이 떠올랐다.

<aside> 💡 지금, 한국 문학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aside>

문장 분석하듯 질문을 해체하면 세 가지 요소로 접근할 수 있었다. ‘지금’의 인문학 접근이 어렵다면 과거부터 현재를 아우르는 범위까지. ‘한국 문학’에 읽을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면 외국 문학까지. ‘무엇을’에는 장르로 접근하되, 시(운문)는 너무 어렵고 소설은 내 흥미가 없었다. 원래 비문학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까지 고려했을 때 ‘수필’이 생각났고 바로 이런 고민 끝에 선택한 책이 <곶감과 수필>이었다.

<곶감과 수필>은 윤오영 선생님의 산문집, <고독의 반추>(1974), <방망이 깎던 노인>(1976), <수필문학입문>(1975)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 가려 뽑은 것이라고 한다. 주제와 내용을 고려하여 산문집의 배열을 다르게 하였으며 주로 각 수필 내용들은 독립적이다. 수필들은 정민 교수께서 엮었으며 한자를 현시점에 맞는 한글로 표기한 부분도 있다고 밝힌다.

책은 수필을 담고 있으나 윤오영 선생님께서 그 외에도 독서론에 관한 내용, 작문에 관한 내용, 겪었던 일화까지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내가 기존에 읽는 책들이 많아서 이 책이 실제로 두껍지 않은데, 읽는데 3개월이 넘게 걸렸다. 나는 독서 모임을 여러 군데에서 하는데, 이 책의 내용이 독립적이고 ⌜나의 독서론⌟ 같은 내용은 독서 그 자체의 이야기도 정리가 정갈하게 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한 적도 있었다. 감명 깊은 글귀를 발췌하여 몇 구절씩 적다 보니 하루에 한 에피소드 정도를 읽게 되었고 그 때문에 완독하는 데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가끔 ⌜깍두기설⌟과 같은 명작을 만나게 되면 곱씹느라 다음 진도가 밀리기도 했다.

누구는 이 산문집을 읽으면 수필의 진수(眞髓)를 알게 되었다느니 소재의 선정이 실로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수필의 확장을 느꼈다느니 하는 말들을 할 것이다. 또는 문학의 학문적인 요소 등을 깊게 볼지 모르겠으나 전공부터가 공학도인 내 처지에서는 가끔 나오는 한자들과 사자성어들과 전제로 깔린 고사를 따로 찾아보기 바빠서 배경지식이 부족함에 아쉬운 적이 많았다. 그러나 감히 짐작건대 그것은 윤오영 선생님의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양잠설⌟을 보면 글을 쓰는 단계가 등장한다. 쓰기 위해 읽는, 글 쓰는 사람의 과정을 누에가 자라는 탈피의 단계에 빗대어 설명한다. 이는 단순한 지식이 축적되어서 사람이 성장하는 것만을 밝힌 것은 아닐 것이다. 우수한 작품을 쓰기 위해 자기 함양, 숙고의 시간도 언급되기 때문이다. 독서가 지식 쌓기만의 목적이라면 누에가 나방이 되는 것의 완전 변태 같은 목적이 아닌 결과와 같을 것이다.

⌜깍두기설⌟에서 C군과의 대담이 나온다. 글 장르의 비판적인 시각과 독서에 관한 젊은이의 고뇌와 소품(小品)이라 불리는 글에 대한 노인의 농담(濃淡)이 나온다. 이 대목에서 과거에 철학과 교수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나는 교수님께, 고찰이 없어 빈 껍데기처럼 접근하는 학습 태도가 수업 시간에서 의미하는 주제를 온전히 힘들 것이라고 우려함을 고한 적이 있었다. 연륜이 깊은 교수님들께서는 내게 섣부른 조언을 해주시 거나 너도 부족한 학생이라고 다그치지 않으셨다. 어른이 보는 아이의 시각이 이런 것이었을까. 아마 윤오영 선생님께서도 하고 싶은 말이, 생각이 작품을 통해 이렇게 시나브로 들어오는 듯하다. 사색만이 정답이 아니었다. 그저 기특하게 나를, C군을 바라볼 뿐이었다.

⌜백의와 청송의 변⌟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빗대어 봐도 배울 점들이 많았다. 나라의 현실을 논할 때,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토속물과 자연물 등에 ‘OO 망국론’이라는 말을 함부로 붙이는 것이 얼마나 누워서 침 뱉는 행위인지 적나라하게 보인다. 예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적송(赤松)은 리기다소나무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다. 굽은 나무가 있기에 그늘이 존재할 수 있고 굽는다는 것이 침엽수가 극상을 이루는 숲에서 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존전략일 것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소인배의 심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내 것을 모르고 남의 것을 논하는 것은 언제나 병폐가 있기 마련이다. 세계화가 된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이루고 있는 것들이 사유 없이 거저 나온 것이 아니다. 글과 같이, DNA도 수정과 편집이 단백질에 의해 진행된다. 환경과 나의 자아에 관해서도 고찰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머니께서 이 책을 읽고 싶어 하신다. 기분이 좋았다. 문체가 너무 예스럽고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수필을 읽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좋아하는 수필 에피소드를 두고 이게 좋다, 저게 감명 깊다 등으로 공감해주신 분들이 많았다. 그만큼 작가의 깜냥이 증명되는 순간이었고 공감의 포인트가 다채로운 것이 또 생각해볼 점이었다. 어머니께는 ⌜치아⌟라는 에피소드를 소개해드려, 가족의 사랑을 말씀드렸는데 엄마는 ⌜찰밥⌟이 좋으시단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이 책을 아예 드리려고 한다.

사실 젊은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책은 아니다. 수준 높은 문해력을 항상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재가 ‘노잼’일 확률이 크고 글보다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가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책이 불친절할지도 모른다. 글을 논하기에 연암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하고, 사마천(司馬遷)의 일대기를 모른다면 장면의 상상이 어렵다. 그러나 작은 소재에서 사고가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책을 많이 읽는 다독(多讀)뿐만 아니라 정독(精讀)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독서에만 그친다면 글을 논하고 철학의 단계까지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그 단계에만 머무른 상태 역시 어쩌면 윤오영 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장에 관해 논하고, 글에 관해 이미 어려운 부분까지 서술한 그의 책을 읽고 그 후기를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글은 써보지 아니하면 첫 단추부터 끼우지 않은 것과 같고 좋은 글을 쓰는 경지에는 결국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독서도, 글쓰기도 명확한 단계라는 것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목적이 어디에 있든 현재 내 수준이 어디에 있든 지금을 기록하고 싶었다.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글에 관해 논한 문장이, 인문학에 던진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aside> 💡 내가 쓰는 글에도 시설(柿雪)이 앉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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