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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파괴된 그리스도의 형상 너머로 기어코 불멸의 빛을 읽어내는 도스토옙스키적 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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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도스토옙스키가 무덤 속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한 것은 <신앙을 잃게 할지도 모르는> 죽음의 확실성이 아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죽음의 확실성 너머에 있는 불멸을 읽어 냈다.
출처: 395쪽 중에서
생각: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읽고 미뤄두었던 석영중 교수님의 『백치』 강의를 읽었습니다. 소설의 장면 장면마다 날카롭고 정교한 해석과 당시 러시아의 인문사회적 분위기를 담고 있어 소설만 읽었으면 놓쳤을 부분을 알차게 채워줍니다.
책은 철도-칼-그림이라는 세 가지 이미지를 중심으로 소설을 해체합니다. 그 중 소설의 시작이자 미시킨과 로고진이 처음 만난 장소인 ‘기차’는 당시 물신주의 풍조를 야기한 철도(기계), 신기술 도입을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갑작스런 개혁 개방으로 혼란을 겪는 러시아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알 수 있어 인상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책은 로고진 저택에 걸려있던 그림인 한스 홀바인2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를 주목합니다. 죽은 지 3일만에 환생했다고 전해지는 예수의 행방에 비해 그림 속 그리스도의 모습은 정말 환생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게 합니다. 이성의 육화, 강생으로 표현되기에 그의 모습은 너무도 사실적이고 처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석영중 교수님은 그림 속 그리스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위 인용 문장으로 위로를 건넵니다. 스위스라는 천국에서 파블로프스크라는 지옥에서 백치가 되고 스위스로 돌아가지만, 이미 뇌 기능이 파괴된 미시킨, 미시킨이 자신을 구할 사람임을 알면서도 로고진에게 죽임 당할 수밖에 없었던 나스타시야는 예수와 마리아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결말은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인용 문장은 이런 소설 내용을 향한 작은 위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주말이면 인근 공원 야산을 찾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산책로에서 빗자루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마치 스님처럼 산책로의 낙엽을 쓸어내곤 합니다. 절 마당에 풀 한 포기 없는 이유는 씨앗에 싹이 트기 전 빗자루로 쓸어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금 쓸다보면 나뭇잎이 내려앉아 있습니다. 쓸어도 쓸어도 끝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빗자루로 산책로를 쓸면서 마음은 편안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빗자루로 나뭇잎을 쓸어내다가도 새로 떨어진 나뭇잎을 보면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는 건 내가 막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갖습니다. 약간 포기하는 마음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오늘 어떤 분이 저를 빤히 보시더니 본인이 낙엽을 다 쓸어준 거냐며 복 받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별 일이 아님에도 기꺼이 좋은 말씀을 남겨주신 그 분께도 복이 따르기를)
소설 백치의 결말도 사실 체념과 포기, 허탈함을 줍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말씀처럼 **「무덤 속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모습에서 무상함을 느끼기보다 죽음의 확실함 너머 ‘불멸’을 기어코 찾아낸다면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처럼 결코 두려워할 건 없다고 믿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아낀 소설 『백치』를 읽으신다면 석영중 교수님의 책으로 빈틈을 채워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작성일자: 2026.3.21.)